: SakeJyun _ confusion matrix
Sakesi Hiro
Hanabusa Jyun
핸들을 돌리는 손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차창 바깥으로 보이는 것은 고즈넉한 바다의 풍경이었다. 길쭉한 손가락이 버튼을 눌러 창을 아래로 내렸다. 바람이 선선하게 차 안으로 불어오고, 짭쪼름한 바다 냄새가 축축하게 들어왔다. 하나부사 쥰은 조수석에 앉아있던 이를 흘긋 바라보았다가, 짧게 말했다.
“바다 속에 들어가서 익사하실 생각은 없으신 거 맞습니까?”
“누가 인공호흡이라도 하면 어떡해요, 더럽게.”
“…그래요. 없다는 걸로 알아듣겠습니다.”
어쩐지 살벌한 대화였지만 두 사람은 비교적 평온했다. 직전까지 그들이 겪고 왔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폭발이라거나, 건물 붕괴라거나, 죽은 사람들, 그리고 죽었던 사람, 죽을 뻔한 사람…. 어지럽고 뜨거운 광경이 뇌리를 스쳤다. 그 일의 원흉이었던 사케시 히로는 짙은 녹빛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가만히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무척 차분하면서도 관조적인 움직임이었다.
전말은 간단했다. 사케시 히로는 그 날 자신의 인생 전반을 괴롭히던 모든 이들을 죽인 뒤 함께 자살하려 했으며, 이로써 사케시 가家의 굴레를 끊으려 들었다. 세간의 유명함과 더불어 악질적이기도 했었던 기프트 사가 엮여있었으니 그럴 만도 한가, 싶긴 했으나 다른 문제가 있었다는 게 관건이었다. 일을 치루기 며칠 전, 그는 태연하게 쥰과의 대화를 지속하며 여행을 가자고 했었으니까. 죽기 위해 활활 불타 무너지던 건물 안으로 기어들어가려던 이를 잡아 끌고 온 결과가 지금의 눈 앞에 있는 바다였다. 쥰은 어쩐지 지끈거려진 머리 덕분에 잠시 동안 이마를 짚고 미간을 주무르는 시간을 가졌다. 신호등이 붉은 색이라 핸들에서 손 하나를 떼어내는 게 괜찮았으니 다행이었을까.
피골이 상접해 있던 회사원, 하나부사 쥰은 이런 식으로 제 옆에 있는 이와 여행을 오리라 생각한 적 없었다. 적어도 각자 맡기로 한 물품을 준비하고, 도시락을 싸고, 평범하게 여행 계획을 짜면서 차를 타고 가는 길에는 가루가 잘 흐르지 않는 간단한 간식을 나눠먹는 정도만을 떠올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 하나도 맞는 게 없었다. 준비된 물품은 없었으며, 도시락조차 없고, 계획은 비틀어졌으며, 간식을 나눠먹기는 커녕 대화조차 뚝뚝 끊긴 지 오래였다.
“사케시 히로 군.”
“…….”
대답 없는 붉은 눈동자만이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름이 불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히로는 굳이 대답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계속 이야기하라는 것처럼 재촉하는 홍채가 미동 없이 쥰을 응시했다. 쥰은 그 눈빛을 이미 체감하고 있었다. 잠이 들면 새벽 내내 쫓아오듯 붙어 있던 감시카메라같은 시선. 덕분에 제 속에 있던 것이 제어되고 있었지만, 당장에서야 그걸 알 길은 없었기 때문에 꺼림칙하다는 감각 정도만을 되새겼다.
“기분은 좀 나아지셨습니까.”
“별로예요. 계획을 새로 세워야 하게 되었으니까.”
“문제 없군요.”
대수롭지 않게 발판을 밟힌 차가 아스팔트도 깔리지 않은 간이 주차장으로 향했다. 잘 닦여 있던 검은 차체는 어느 새인가 모래먼지나 돌이 튄 자국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차주는 거침없이 흰 칠이 되어 있는 네모난 칸 안으로 바퀴를 굴려 넣었다. 군더더기없는 운전 솜씨였다.
이게 평범한 게임이었다면 분명 보너스 점수라도 얻을 수 있었겠으나, 그런 한가로운 생각을 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쥰은 한참 동안이나 고민했다. 그를 이대로 풀어주어도 괜찮은 것인지에 대한 고뇌였다. 사케시 히로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들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위가 아픈 것 같기도 했고. 그가 ‘사고’로 죽고 나서 타는 모든 보험금을 ‘하나부사 쥰’의 앞으로 돌려놓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문서를 그대로 찢어버리고 싶었다. 그런 돈을 받고 싶어할 것 같던가? 핸들을 돌리고 시동을 끄는 쥰의 손길이 조금 거칠었다.
“아직도 화나셨나요?”
“예.”
사케시 히로는 더 물어보지 않고 그의 화가 가라앉길 기다렸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아주 늦은 밤이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손님은 없이 텅 비어 있는 광경만이 보였다. 한참 동안 기다려서야 철컥, 하고 문의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사케시 히로가 있는 쪽의 문은 여전히 잠겨 있는 채였다.
쥰이 먼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와 조수석의 문을 대신 열었다. 히로는 그제서야 땅을 밟는 것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몸 여기저기 난 생채기, 불길 덕분에 조금 그을린 백의. 손에는 오는 길에 발라둔 연고와 밴드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엉망진창이었다. 흐트러진 정장을 입고 있던 쥰 또한 바다를 관광하러 온 사람이라기엔 어폐가 있는 차림이었지만 그들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홧김에 와 버린 거니까.
쥰은 말없이 히로에게 손짓하고, 파도가 치는 바닷가 근처로 걸어나갔다. 히로는 잠시 동안 그 광경을 가만히 바라본 뒤에 쓰라리는 다리를 내딛어 걸었다. 파도가 점차 시야에서 가까워졌다. 육지를 삼킬 것처럼 몰려오던 바닷물이 희고 부글거리는 포말을 일으키며 다시 물러나길 반복했다. 쥰은 파도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달빛으로 어렴풋하게 밝아진 하늘이 보였다.
“안 돼요.”
“……저, 아직 아무것도 안 꺼냈습니다.”
“당신이 주머니에서 꺼내는 게 휴대폰과 담배, 아니면 뭐겠어요.”
히로의 작은 일갈에 떨떠름한 표정이 된 쥰은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잡았음에도 차마 꺼내지 못한 담배갑이 덩그러니 주머니 속에 남아있게 되었다. 어쩐지 꿍얼대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히로는 무시하고 덧붙였다. “건강하셔야죠.” 입 발린 말을 그의 귓속으로 집어넣자, “당신 덕에 이미 몇 년쯤 수명이 떨어져나간 것 같습니다.” 지지 않고 쥰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히로가 재빨리 반박했다.
“수명을 신경쓰고 계셨나요?”
“말이 그렇다는… 하, 예에.”
갑갑한 한숨을 쉰 하나부사 쥰은 대화를 이어갈 의지를 잃었다. 한 번 이겼다는 듯 사케시 히로가 고개를 털어내고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바닷바람이 다시 한 번 불어오니 정리된 머리카락이 다시 흐트러지며 나부꼈다. 새벽은 아직 한참 남았으며,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눌 시간 또한 장황하게 남아있었다. 그러나 인생 이야기를 하기엔, 아직 버거웠다.
말 없이 한 걸음, 두 걸음. 그저 앞으로 나아갔다. 파도가 닿지 않을 아슬아슬한 경계선까지 들어가 짙은 색으로 젖어 있는 모래와 자갈을 밟았다. 푹푹 꺼지는 발 안으로 모래가 들어와버렸기에 쥰은 결국 구두를 벗어들어 손에 쥐었다. 양말까지 벗고 나니 맨발이 모래에 닿는 감촉은 생경했다.
맨발이라 불리는 살갗은 자택이라는 공간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부위였다. 항상 슬리퍼를 신고 있기까지 했으니 말 다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렇게 쉽게 드러나고 말았다. 단지 신발 안에 이질적인 조각이 들어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군가가 침범한다면 어쩔 수 없이 보이고 마는 민낯과도 같았다. 그걸 누가 꾸짖겠는가. 감히 보이면 안 될 것을 보였다고? 아니, 그런 법은 누가 정했던가. 민낯이라는 게, ‘본심’이라는 것이 그리 나쁘던가? 되새김질해본다면, 딱히 그렇지만도 않았다.
차를 타고 오던 길, 히로는 쥰에게 물었다.
‘안정적인 인생을 사는 건 대체 무슨 기분인가요.’
쥰은 곧장 대답할 수 없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아마 고개를 저었을 테지만,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부정적인 말이 가장 먼저 입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적어도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으며, 그것이 그의 진심과 마찬가지였다. 참으로 진솔한 답이었다.
‘저도 안정적인 인생은 아니니까, 그렇게 물어보셔도 좋은 대답을 드릴 수가 없네요.’
그리고 짧게 덧붙이기도 했다.
‘당신 덕분에.’
그건 이른바 볼멘소리와도 같았다. 너 때문에 내가 이 고생까지 하고 있다. 그러니까 좀 얌전히 살아라. 죽을 생각 좀 하지 마라. 지금까지 잘 하고 있지 않았느냐. 평범하게 살자고. 안정적으로 살아보자고. 그런데 왜 자꾸 이러는 건데, 응? 대체 왜?
‘쥰 씨도 험난한 인생을 즐기는 거 아닙니까?’
‘…아뇨, 전 평범한 인생이 좋아요.’
‘매일 똑같고 따분한 일상 같은 건 당신 성에 차지 못할 걸요?’
‘…….’
머릿속에서 떠돌아다니던 수많은 외침이, 상대에게 닿지 않고 가라앉았다. 히로에게 탓하는 말을 해 봤자 돌아오는 건 질책과 질시, 그리고 귀찮음과 불신일 것이었다. 쥰은 하지 않아야 할 말을 분별하는 것에 탁월했으며, 하면 안 될 말을 꺼내지 않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러고 나면 대부분의 단어를 상실하고 말아 침묵만 유지하게 되는 일이 잦긴 했지만, 열 마디 말보다는 10초 동안의 침묵이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곤 했다. 그것이 체득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때 참지 못했다.
‘매일 똑같고 따분한 일상을 겪은 적이 없는데요.’
그런 말을 하면서는, 어쩐지 조금 웃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게 비웃음이었을지, 마음에서 우러난 농담이었을지. 혹은 정말로 재미있는 사실이라고 생각해서 미소를 지었던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찰박, 파도가 높게 치는 바람에 발에 차가운 물이 닿았다. 쥰은 걸음을 그대로 멈추고 발바닥을 적신 물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뒤따라오던 히로는 이미 멀찌감치 파도를 피해 물러난 참이었다. 그걸 보고도 조금 웃었다. 깔끔 떨기는.
“기왕 왔잖습니까. 발이라도 담가 보십시오.”
“…….”
히로는 쥰을 바라보고, 쥰의 손에서 흔들리는 구두를 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더 아래로 내려 해수에 담구어진 맨발을 보았다. 일련의 행동을 쥰이 가만히 마주본다. 히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사내였다. 초점이 없는 새빨간 눈동자 하며, 어딜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건 고사하고, 어떤 행동양상을 따르고 있는지조차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부사 쥰은 그를 인간으로 대우했다. 제 몫을 해내려 노력하고 있었으니까.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애썼으니까. 그리고, 언젠가의 질문을 떠올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살인은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히로가 일을 치르기 전, 하루 일과 도중 TV를 보고 있을 때 했던 말이었다.
뉴스에서는 마침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하나부사 쥰은 곧바로 부정했다. 살인은 어느 지점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죄였다. 죗값을 치르는 것에 대한 기준이 어떤지에 대한 논쟁도 두어 차례 지나갔던 것 같지만, 결론적으로… 사케시 히로는 대화를 또다른 질문으로 끝맺었다.
「제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면… 그 살인마한테도 반성하라고만 말할 겁니까?」
그는 아주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이 문장이 히로를 말한다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쥰 또한 같았다. 하나부사 쥰은 가까이 하는 지인들에게 있어 한없이 너그러운 사내였으며, 인내심은 높았지만 발화점이 낮았다. 그렇기에 쉽게 죽음을 입에 담는 히로에게 대답할 여유를 잃고 말았다.
「사케시 히로 군.」
느리게 담았던 이름. 찌푸렸던 얼굴. 그리고 기나긴 정적.
「이제 그만.」
이후의 모든 대화는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얼굴 중, 누구도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게 철천지원수일지언정, 시체로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차라리 실종당하는 게 마음이 편하겠다고 이야기하면서도 한없이 실종자 판넬을 뒤집고 기회가 될 때마다 수소문하는 자가 어찌 쉽게 인연을 놓겠는가.
그래서 사케시 히로가 죽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 간단하고 이기적인 이유였다.
그러면, 마음이 편하니까.
정적을 가로지르고 파도 소리가 다시 귓가를 치며 울렸다. 히로는 쥰의 요구에 주춤하는 것 같더니, 조심스럽게 제 구두를 벗어들어 그와 비슷하게 손에 걸쳐 들었다. 맨발이 땅에 닿자 불쾌해하는 표정이 스쳤다. 다시 갈무리하는 데에는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쥰은 그 시간을 무시해주었다.
“차갑고 불쾌한데요.”
“익숙해져 보세요.”
쥰은 손을 내밀었다. 한참 동안 허공을 가른 채 유지되던 손 위로 너덜너덜한 히로의 손이 닿았다. 평소 장갑을 꼈었지만, 나으려면 한참은 걸릴 거라며 몇 번이나 끼지 말라는 잔소리를 퍼부은 결과였다. 공기가 제대로 통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말에 반박하듯 산소와 피부 상처 구성물질의 접합 및 접목 여부는 회복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히로의 중얼거림이 있긴 했지만 그 부분은 일부러 귀담아듣지 않았다.
잡은 손이 가볍게 끌려왔다. 넘어지지 않게 걸었다. 발가락 사이로 젖은 모래가 부드럽게 빠져나간다. 너울거리는 파도 위로 등대의 불빛이 아른하게 반짝였다. 구름에 가렸던 달빛이 흐리게 그림을 그리며 바다 위를 가른다. 찰박이는 발걸음 소리는 청량했으며, 고요하다.
평소와 똑같지도 않고, 따분하지도 않은 일상.
‘…그러니 동경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부사 쥰은 사케시 히로와의 오늘을 또 하나의 일상으로 정의하고 말았다.
이는 한 때의 재난이었을지도 모르나, 그는 이 날을 후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