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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enki _ Nichizjou
Itokichi Aki​

Amake Hokuto

건널목의 신호가 바뀌며 경적과 함께 기차가 들어왔다. 부드럽게 선로를 돌은 차체는 이윽고 간이역에 도착한다.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벤치 두 어 개 남짓한 역에 드물게 손님이 내렸다. 호쿠토가 자판기 앞에 멈춰서자 아키가 다가왔다.

 

“찾으시는 음료라도.”

 

“아, 여기 뜨거운 음료는 없어서요.”

 

“정말이네.”

 

뜨거운 커피와 코코아에는 품절 표시가 띄워져 있었다. 하는 수없이 두 사람은 역에서 나와 차도와 보도가 합쳐진 일차선로를 걸었다. 집과 집 사이 좁은 일방통행로를 지나자 겨우 횡단보도와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 해안가에 도달했다. 평일 오전의 겨울 바다는 한적했다. 모래사장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 텅 빈 편의점은 운좋게도 온장고 전원이 들어온 상태였다. 누군가 생존에 기대를 걸며 자가 발전기를 연결해 둔 것일까. 아키는 고민하다 계산대에 100엔 동전 세 개를 올려두고 가게를 나섰다. 그동안 호쿠토는 각자 몫인 코코아와 밀크티 뚜껑을 열어두었다. 벌레는 음료를 즐기거나 바다를 여행하지 않나요? 아키는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을 무시하고 연인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바다로 여행을 떠나요. 그 말을 들은 아키는 곧바로 여로의 성공을 점쳤다. 창밖으로 벌레가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가 들렸다. 암막 커튼으로 바깥을 감추고 정부에서 지급했던 통조림 캔과 보존 식량으로 생명을 연장한 지 어느덧 반년. 가끔 호쿠토는 홀로 밖에 나가 마트나 편의점에 남은 음식들을 구해오면서 인간이 밖으로 나서도 될지를 점검하고 경로를 확인했다. 감자와 당근은 싹이 난 부분을 도려내고 유통기한이 긴 고형 양념을 풀면 그럴듯한 스튜가 완성되었다. 먼저 묻기도 전에 호쿠토가 말했다. ‘저들은 식사하지 않아요. 그러니 지상에 재료가 남더군요.’ 아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운이 좋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 말은 결국 자신이 지구 최후의 인간이 맞다는 거다. 호쿠토도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화제가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비상 조명이 켜진 마트 내부는 의외로 밝았다든가, 식료품점의 음식이 동나면 호텔 레스토랑을 찾아봐도 좋겠다든지. 한때 해결사로 봉사했던 아키는 맞장구치며 대화를 자연스럽게 포장하는 데에 능숙했다. 씨만 구하면 부엌에서도 바질이나 파를 기를 수 있다는 말에 호쿠토는 크게 기뻐했다. 언뜻 차분하고 침착하나 세상에 나선 지 얼마 안 된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어, 새로운 지식에 기뻐하고 호기심을 보이며 행동력이 좋은 사람. 아마아케 호쿠토의 주변인이 입 모아 표현하는 그는 이런 모습이다.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평가는 조금씩 달라진다. 원숭이탈을 쓴 남자나 피곤한 인색의 회사원은 장검을 휘두르는 그를 어쩔 수 없이 두려워한다. 휠체어 위에서 기다란 백의 자락을 펄럭이는 작가는 검사의 폭력적인 면모까지 걸음마를 뗀 아이를 보듯 귀여워한다. 아키는 매해 호쿠토가 신사 토리이를 건너며 비는 소원을 기억했다. 이케부쿠로의 모두가, 저와 아키 씨가 행복하면 좋겠어요. 해가 바뀌어도 소원은 그대로냐며 웃으면 호쿠토는 그제야 깨달았다는 듯 겸연쩍어했다. 비일상에서 태어나 경계를 거슬러 일상에 닿은 사람. 그렇기에 일상의 소중함을 안다. 아키는 그런 상대를 좋아했으니 일상을 가장하는 어린아이 같은 율동에도 선선히 따라갔다.

가장한 평화의 지저에는 첨예한 칼날이 솟아 있다. 언제 바늘 끝이 발바닥을 찌를지 모르며 억지로 꾸며 이어나가기로 정한 순간부터 연기에 불과하다. 반복하다 보면 가짜도 진짜가 된다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만은 진실이라 위로하면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햇살에도 그림자가 졌다.

“아, 이 길로 가면 신사네요. 늘 산 반대쪽으로 와서 몰랐어요.”

“신사요. 저기 나무 사이로 보이는 토리이 말입니까.”

“네, 매해 참배했던 곳. 그래서 이 바다를 고르신 게 아닌가요?”

“신사 참배를, 매년.”

“……네.”

그래, 바로 이런 때. 아마아케 호쿠토는 죽어 버렸고 인간의 외피를 뒤집어쓴 괴물물이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라 실감한다. 가슴에 선명하게 자리잡은 진실을 언제까지고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꾸며낸 행복의 지하에서 꿈틀대는 어둠이 자꾸만 마루 틈 사이로 뻗어 나왔다. 얼룩을 가리려 깔아둔 카펫과 테이블보까지 검게 물들면 더는 피할 수 없이 눈을 마주쳐야만 했다. 붉은 동공이 과녁 정중앙을 겨냥하듯 꽂힌 눈동자가 깜빡임을 잊은 채 아키를 지그시 바라봤다. 레몬처럼 옅은 노란색은 경고를 상징한다. 호쿠토의 원래 힘만으로도 벽이 뚫릴 야트막한 민가는 그마저도 지붕이 무너져내려 있었다. 차도 끄트머리 터널에서는 벌레의 날개짓이 들리고 반대편에는 도망치다 추돌한 자동차 차체가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그리고 태평양까지 이어진 바다. 포식자가 마지막 은혜를 베풀어 도망치라 경고하더라도 사방이 막다른 길이었다. 

호쿠토와 아키가 동시에 입을 여는 순간 파도가 들이닥쳤다. 철썩, 모래사장에 물살이 부닥치면서 파동이 지면을 뒤덮었다. 두 사람을 에워산 공기는 비리다 못해 씁쓸할 지경이었다. 저 바다에 빠지면 누구나 짜고 축축하고 습해지겠지. 벌레든 인간이든 잠긴 순간 깊은 중력에 끌어당겨 처박히긴 매한가지다. 지구상 모든 생물은 바다에서 기원하고 망자는 강을 건너 저승으로 향한다. 수류가 세상 전부를 잇는다. 차디 찬 겨울 바다에 빠지면 모두가 체온을 잃고 죽어 버린다.

파도가 두 사람의 발자취를 추월했다. 소금물이 얇은 가죽을 뚫고 맨발을 적셨다. 아키는 조금 더 바다로 다가갈지, 아니면 방파제 위로 올라갈지 고민했으나 선택은 으레 타인의 몫이었다. 보폭을 넓힌 호쿠토는 단숨에 바다와 땅이 닿는 경계로 다가가더니 그대로 몸을 뒤로 젖혔다. 버드나무의 가느다란 가지가 동풍을 따라 춤추듯 기다랗고 마른 육신이 고꾸라졌다. 바닷바람이 워낙 강해 첨벙하고 빠지는 소리마저 묻혔다.

“호쿠토 씨.”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요.”

“음.”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키는 답하지 않았다. 메이드가 사과를 받는 건 이상하다. 무엇보다 사과는 아무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정성스런 말 한 마디로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낙원 따위가 아니었다. 진실은 여전히 불변하며, 이토키치 아키가 아는 사실은 하나.

“괜찮아요. 이게 당신의 최선이라면.”

이 끝나버린 지구에서 당신만이 내 곁에 머문다. 

언젠가 이 바다가 흘러넘쳐 남은 문명의 흔적마저 집어삼켜 모든 생물이 물 속으로 회귀할 때. 그 순간에도 두 사람은 함께일 것이다. 하여서 죽음도 삶도 더는 두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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