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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GAI _ purgatory
Iesiki Kanae
Tsukinoumi Ryusei

  01.

  “별을 보러 가죠.” 파도조차 치지 않는 바다에 자그마한 물이 떨어진다. 그건 갓난아기의 새끼손가락보다 작고 빗물보다도 연약해서 작은 파문조차 일으키지 못하고 거대한 바다에 삼켜질 듯 보였지만, 빗물조차 상대하지 못하는 자그마한 물은 미동 없는 바다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 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찻잔을 손에 힘 주어 감싼다. 얼굴을 확인하지 않고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음에도 놀라서 그만 얼굴을 확인한다. 이 방에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도, 멀쩡한 정신으로 차를 나눌 수 있는 사람도 이제는 이 세상에 한 명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니, 새삼스럽게 얼굴을 확인할 일도 아니었다. 나이를 너무 먹어서 노망이 난 게 아니라면 십 분도 지나지 않은 일을 망각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믿을 수 없어 꿈에서 깨기 위해 볼살을 깨문다. 녹진하게 입안을 퍼지는 비릿한 맛, 아린 통증. 그 모든 게 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실 꿈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꿈이 아니라면 볼 수 없는 광경이어서 수십 년을 함께하고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미지를 여전히 방법 하나 손에 잡지 못하고 마주한다. 그런다고 해서 미지를 이해하기 커녕 그 속을 들여다볼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당신이랑 보고 싶어요.” 기도에 커다란 덩어리가 낀 듯 숨이 막힌다. 생으로 된 살점을 삼킨 것처럼 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온다. 독감에 걸린 듯 머리가 무겁다. 몸이 마비된 것처럼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전신이 뭉개지고, 뼈가 뒤틀리며, 신체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고, 맨정신으로 신체 부위가 절단되었을 때조차 괴롭다고 느낀 적이 없었음에도, 우습게도 그런 과거를 비웃어줄 만큼 괴로움이 온 정신을 지배한다. 별을 보러 가자는 말이, 함께 하고 싶다는 말이,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고작 그런 말 한마디가, 지옥 불에서 불타는 고통을 만든다. 이제는 찻잔의 열기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감각이 마비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숨을 한 번 쉬는 걸로 신체의 모든 장기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걸 싫어도 알 수 있었다. 

 

  빗물보다도 나약한 작은 물 한 방울이 떨어져서 커다란 해일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해일에 삼켜져서……. 

 

  “류세이, 찻잔이 깨졌어요.”

  “…아.”

 

  누군가 억지로 손을 붙잡고 몸을 부상시킨 것처럼 정신을 차린다. 뜨거운 액체가 맨발을 적시고 조각난 날카로운 파편이 얇은 피부 껍질을 찢는다. 물속에 몸이 던져진 것처럼, 누군가 의도적으로 귀를 막은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든 감각이 사라진 것처럼 찻물의 뜨거운 열기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벼운 화상을 입어 발갛게 물든 발등을 스친 날카로운 파편이, 열 오른 피부를 찢어내고 끈적거리는 검붉은 피를 흘린다. 사라진 감각이, 마비된 고통이, 유리가 깨지기라도 한 듯 한순간에 돌아온다. 화끈거리는 고통이 왼쪽 발등을 괴롭히지만, 아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멈추었던 세포가 억지로 활성화되는 것처럼 움직이면서 끊어진 혈관을 이어 붙이고 찢어진 피부를 합친다. 열 올라온 발등에서 느껴지던 고통이 우스울 정도로 급속도로 식어 본래의 차가움을 되찾는다. 바랐지만 바라지 않았던 불사의 재생력이 결코 자그맣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처를 회복시킨다. 고작 물 한 방울이 일으킨 해일은 너무나 거대한 재앙처럼 나를 완전히 삼키고 그 숨을 빼앗을 듯 덮쳤다. 재앙을 눈앞에 둔 인간이 그 거대함 앞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는 듯,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를 재앙에 몸을 벌벌 떠는 듯. 겨우 다시 붙은 숨에 연명하면서 파도 소리 하나 없는 바다를 바라본다. “아프신가요?” 보통이라면 걱정에서 나올 말이었지만, 말 한마디만큼의 걱정조차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언제 다시 물 한 방울이 떨어져 커다란 해일이 일어날지 두려움에 몸 떨면서도 겨울이라서 그런 듯 식어버린 찻물이 떨어지는 발을 힘을 주어서 들었다. 깨진 파편이 날카로운 사선을 그리면서 바닥에 떨어지더니 나무 바닥에 작은 상처를 만든다. 

 

  “…놀리려고 묻는 거야?”

  “보통 다치면 걱정하잖아요.”

  “보통은 그렇지만, 넌 아니잖아.”

  “걱정하는 건 싫으세요?”

  “어, 싫어.”

 

  애초에 그 입에서 걱정이라니 안 어울리는 것도 정도가 있다고. 막말이라고 불러도 좋을 말을 서슴없이 술술 흘려도 그 깨끗한 미간에는 작은 주름조차 생기지 않는다. “사람은 이런 분류의 인간을 좋아한다고 하더라고요.” 어린아이가 서당에서 처음으로 배운 학문을 실천하듯 마흔 살이 훌쩍 넘은 어른은 유감스럽다는 듯 식탁을 손가락으로 치댄다.

 

  “당신은 이상하네요.” 

  “…너한테만은 죽어도 안 듣고 싶은 말 1위야.” 

 

  누가 누구를 보고 이상하다고 말하는지. 기가 차서 웃음이 나오는 것을 삼키는 대신 보고서로 사용된 종이를 거칠게 뜯어 바닥에 흩어진 날카로운 파편을 정리한다. 물기를 닦아내지 않은 바닥은 여전히 축축했고, 자그마한 파편을 줍지 못한 바닥은 변함없이 위험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맨손으로 파편을 만지자 생긴 손가락의 상처는 아픔을 느끼기도 전에 아물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창밖에서는 새하얀 눈이 내리고 얼어붙을 정도로 시린 겨울바람이 매섭게 몰아친다. 난로로 구비 해둔 장작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불타는 소리만이 방안을 고요하게 울린다. 

 

  “그래서…무슨 생각이야?”

  “생각…인가요. 다른 의도는 없었어요.”

  “…그게 아무런 의도도 없이 했다는 말이야?”

  “네. 특별한 일도 아니잖아요.”

  “……넌 그러겠지.”

 

  어릴 적부터 질리게 얼굴을 마주한 소꿉친구는 수도의 평균 수명보다도 시간이 오래 지나자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변했던 걸지도 모르고, 변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을지도 모르고, 정말로 몰랐을지도 모른다. 과정이 뭐든 결과로써는 내가 알던 소꿉친구는 내가 모르는 소꿉친구로 변했다. 그 변화는 달가워야 할 것이 분명함에도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나오고, 폐 속에 이물질이 낀 것처럼 갑갑하다. 특별함이라는 말은 자신만이 사용하던 특권이었는데, 이 갑갑하고 자기 멋대로인 소꿉친구는 그조차 모른다는 것처럼 권리를 침해한다. 

 

  커다란 바람이 불었다. 마치 지금이라도 당장 우리를 삼킬 해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징조를 보여주는 듯. 

 

  “당신은 아닌가요?”

  “난 아니었던 적이 없어.”

 

  물기를 완전히 흡수한 나무 바닥이 짙은 갈색으로 물든다. 달그락, 달그락…. 잔이 부딪히는 소리, 간식으로 내온 서양과자가 부서지는 소리, 천장에서 쥐가 뛰어다니는 소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크게 귓가를 울린다. “그런가요.” 공백 없는 대답에는 고민조차 보이지 않고 급속도로 내려온다. 알고 있을까. 처음 만났던 그 시절부터 네 숨소리 하나조차 특별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는 것을. 모를 거다. 그리고 평생 모르게 할 생각이었다. 알려주어도 이득이 될 것 없었고, 몰라도 손해가 될 것이 없었다. 그 특별함이 감히 인간을 인간으로 비추지 않는 거대한 재앙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결코 전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아니, 내가 그러길 바랐다.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알아주지 않기를 바랐다. 평생 모르고 있기를 바랐다. 신처럼 추앙받고 무엇이든 이루어내며, 무엇이든 꿰뚫는 이가 유일하게 모르는 걸로 존재하기를 바랐다. 오직 내가, 홀로 그 자리에 존재하고 싶다는 탐욕. 그리고 회피. 

 

  “저도 그래요.”

  “…그러냐.”

 

  거짓말.

  바닥은 여전히 젖어있었고, 자그마한 파편이 눈에 보이지 않게 바닥을 더럽히고 있었고, 날카로운 파편을 감싼 빳빳한 종이가 구겨진 채로 식탁 위를 구르고, 바깥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이 창을 치대고, 그 녀석의 입가에는 즐거운 듯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내린다. 탐욕과 진실을 눈앞에 두고 거리낌 없이 후자를 고른 몸이 다시금 해일에 뒤덮이지 않도록 도망칠 길을 모색했다. 

 

  “가실 건가요?”

  “…갈 거야.”

 

  물론 아무리 길을 모색해 봤자 도망갈 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02.

  자칭, 신의 의지를 이어받고 태어났다는 유명한 점술가가 예언했다. 홍수가 일어난 이틀 후 거대한 별 무리의 잔재가 하늘을 바다처럼 쓸어버릴 것이라고. 그 점술가가 정말로 신의 의지를 이어받고 태어났는지는 몰라도 최근 몇 년간 점술가는 자신의 커다란 예언을 맞추면서 유명세를 키웠다. 지금은 천문학적 거금을 들여도 만나기 힘든 수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기를 얻은 예언가는 한 달 전쯤, 홍수와 함께 대규모의 유성우를 예언했다. 천 년에 한 번 내리는 유성우로, 날을 놓친다면 살아있는 한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다. 아무리 유명하다고 해도, 커다란 예언을 맞추었다고 해도, 점술가가 정말로 예언의 힘을 가지고 있는 건지는 그 누구도 확인할 수 없었다. 거기다 예언은 무조건 맞는 것도 아니었으니, 기대하는 것에 손해는 없지만 그걸 믿고 멀리 떠날 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비현실적인 개념은 실제 경험했다는 복잡한 사정에 기반하면 믿는 쪽에 속했지만…역시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를 자칭 예언자의 말을 듣고 홍수 피해로 발판이 약해진 가파른 산을 오를 정도의 가치는 없었다. 

 

  “저기요 카나에 님? 정말로 거기까지 가시게요…?” 

  “가장 하늘이 잘 보이는 곳이래요.”

  “……믿는 것도 아니면서.”

 

  신이 깃든 아이, 신을 삼킨 인간. 

  남들의 눈을 속여서 행하던 집안의 첫 번째 주술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리고, 소꿉친구는 성인이 되던 해 신이라는 있는지도 모를 존재가 깃들게 되었다. 착각이나 일련의 망상 따위로 치부하기에는 이질적인 존재가 되어서 돌아온 소꿉친구는 그 해부터 바란다면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이라도 이루어내는 존재로 거듭났다. 그러니 나는 신을 믿지 않았지만,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신이라는 작자는, 어릴 적부터 내가 붙잡은 손을 마주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서있었으니까. “네, 안 믿어요.” 소문을 믿지도 않고 소문을 믿고 걸어가던 신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이랑 함께 오기 위해선 이유가 필요했거든요. 그러니 어울려주세요.” 발치에 걸린 돌멩이가 가파른 절벽에서 굴러떨어진다. …또, 모르는 모습이다. 

 

  “어울려주실 건가요.”

  “……평소엔 내 대답은 하나도 안 듣는 주제에.”

  “그래서 대답은요?” 

  “알면서 묻기는…. …어울릴게, 어울리면 되잖아.”

 

  붙잡은 손은 당연하다는 듯 마주 잡힌다. 나는 그 감촉을 처음으로 알았다.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이, 타인을 알려고 하지 않는 인간이,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가…어릴 적부터 단 한 번도 잡은 손을 마주잡았던 적 없는 친구가, 모든 게 끝나버린 지금이 되어서 변할 리가 없다고. 붙잡힌 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가워서 흐르는 혈액조차 멈춰버릴 것처럼 시리다. 

  멈추었다고 생각한 파문이 다시금 일어난다. 손으로 감쌀 정도로 작은 돌멩이가 떨어지고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하더니 세계를 뒤엎을 정도로 거대한 해일을 만들었다. 인간은, 그것을 두고 무력하게 기다리는 것 이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을까. 속이 울렁거린다. 금방이라도 몸속에 있는 모든 장기를 쏟아낼 것처럼 소용돌이친다. 고작, 고작 작은 돌멩이 하나가 뭐라고…. 붙잡힌 손을 내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마주잡은 손을 끌어내려 가파른 산으로 떠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른다. 네가 죽는다고 하여서 내 울렁임이 해결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네 죽음이, 내 삶에 마침표(終止符)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더욱 바라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손을 붙잡았던 그 어린 시절부터 나는 한시도 죽음을 바라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해.”

  “무슨 생각이요?”

  “널 만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그런가요. 하지만 과거를 바꿀 순 없어요.”

  “어. …그러니까 이건 내 멍청한 후회야.”

 

  넘어질 것만 같은 다리에 힘을 준다. 얇은 신발 밑창은 정제되지 않은 산길을 걷기에는 불편하기만 했었기에 발바닥이 시큰거리면서 아팠다. 차라리 나무에서 떨어졌던 그날 만났던 것이 네가 아니라면, 내가 골랐던 집이 너희 집안이 아니었다면, 건네주었던 손을 거절할 수 있었다면 이런 처참하게 침몰 되는 기분을 느끼지는 않았겠지.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해일에 잠길 일도 없었을 거야. 그런 주제에,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기 위해 붙잡은 손조차 내치지 못했다. 그때 그랬다면 따위의 말이 얼마나 의미가 없는지는 알고 있었다. 신조차 과거로 돌아갈 수 없으니, 과거조차 버티지 못하는 인간이 어떤 방법으로 과거를 바꿀 수 있겠는가. 감각조차 마비시키는 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피부를 할퀴면 나는 무력하게 이끄는 손길에 몸을 맡긴다. 

 

  “류세이는 저와 함께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처참한 기분이 들어.”

  “저는 당신과 있으면 즐거워요. 저를 이렇게 만드는 건 당신밖에 없어요.”

  “그래? 날 이렇게 만드는 것도 너밖에 없어.”

 

  잘 됐다. 우리 똑같잖아. 

 

  우리는 똑같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신이 살아가는 장소와 인간이 살아가는 장소가 다르듯 네가 살아가는 장소와 내가 살아가는 장소는 달랐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닿지 않을 손을 매번 붙잡으라고 내밀었던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은, 처음으로 마주 잡은 손길이 마음에 들기라도 한 것처럼 웃었다. 난 웃지 못했다. 버릇처럼 지어지던 웃음조차 그려낼 생각을 하지 못해서 마주한 얼굴을 천천히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가파른 절벽의 마지막 발걸음을 딛는다. 여전히 하늘은 어두웠고, 점술가의 말처럼 그런 아름다운 별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감각조차 사라진 피부를 스치고, 익숙한 어깨 너머로 그저 새까맣기만 한 드넓은 바다가 보였다. 별조차 떨어지지 않는 밤바다는 마치 지옥의 입구처럼 입 열고 있다. 

 

  “류세이, 저는 당신과 만난 걸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요.”

  “…그건 다행이네.”

 

  그런데…, 난 후회밖에 없어, 카나에.

  잡힌 손조차 내치지 못하는 지금도 생각한다. 차라리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러면 내 인생은 여기까지 침몰 될 일은 없었을 거라고. 정작 입을 열어도 머릿속에 떠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말을 전하는 게 무섭지는 않았다. 무섭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던 이유는…이 이상, 더 이상, 침몰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이 처참함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불가능하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는데. 



 

 

 

  03.

  “없네요, 별.” 

 

  도착한 겨울의 절벽은 마치 하늘이 닿을 것처럼 높았다. 겨울이지만 드물게 낮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까맣다. 하늘에 별이 이렇게 없었는지 의아함이 들 정도로 먹물이 부은 듯 새까만 하늘. 피부를 할퀴는 매서운 겨울바람을 피할 방한복조차 없이 여름에나 어울리는 얇은 천 조각으로 만든 의류를 걸치고 우리는, 아마도 이 세상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절벽을 걷는다. 지지대조차 없는 절벽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조금만 발이 미끄러져도 몸에 중심을 잃고 검고 검은 바다에 몸을 처박을 듯 위험했다. “그러게, 하나도 없다.”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아도 작은 별조차 보이지 않는 하늘은, 하늘보다도 바다처럼 보인다. 역시 올 가치 없었잖아. 초치는 말을 건네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떨어질 듯 아슬아슬한 경사를 나아간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너는…. 

 

  “떨어질 것 같아서 걱정이 들었나요.”

  “…설마. 내가 널 걱정할 팔자는 아니잖아. 거기다 넌…이제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처지니까.”

  “그럼 이건 뭔가요?”

 

  한겨울의 매서운 바람보다도 시리고 차가운 온도가 전해진다.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해. 내가 널 걱정할 팔자는 아니잖아?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인간이 신을 걱정해서 어떻게 할 거야. 걱정 따위 하지 않아도 넌 이제 나무에서 떨어지면 다치는 걸 걱정해야 할 미성숙한 어린 도련님이 아니잖아. 바란다면 그게 무엇이든 이루어내는……, 

 

  “제 손을 잡고 있어요, 류세이.”

  “……설명 안 해도 알고 있어.”

  “그건 다행이네요. 뭐…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혼자서 바다에 떨어질 생각은 없거든요.”

 

  충동을 이기지 못해 붙잡은 손이 힘없이 떨어지기 전, 손이 붙잡혔다. 그건 익히 알고 있는 차가움이었다. 그 차가움이 얼마나 될까를 가늠할 즈음이 되어서야 떨어진 손을 붙잡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사실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문제였다. 느끼지 않아도 감지할 수 있는 익숙함이었다. 상대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고, …동시에 가장 모르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익숙하게 붙잡은 손의 차가움은 알고 있지만, 마주 잡는 손길의 감촉은 모르고 있었다. 따분함에 이기지 못해 차갑게 식은 눈빛도, 호기심에 젖어 휘어진 눈동자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 순간이 소중하다는 듯 기쁘게 웃는 얼굴은 모르고 있었다. 결코 볼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태어날 때부터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감을 하지 못하고, 배려를 가지지 못한 존재가, 고작 함께 손을 붙잡고 별도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으로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예측하지 못했다, 꿰뚫지 못했다, 그래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역광도 없이 어둠 드리운 얼굴을 마주한다. 오래된 전설에서 신은 세상을 밝힐 빛과 함께 내려오는 존재라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내 앞에 나타난 신은 단 한 번도 빛과 함께 존재했던 때가 없었다. 마치 그 어둠 본연이라고 말하듯 신은 모든 걸 집어삼킬 어둠과 함께 내려왔다. 지금처럼, 끝도 모르는 바다조차 집어삼킬 어둠과 함께. 

 

  숨을 쉬는 것을 잊는다. 멈춘 숨을 다시 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눈앞에 지어진 어둠 드리운 미소가 내 심장을 비틀었다. 세간에는 여러 이야기가 글이나 음악이 되어서 떠돌았고, 그중에서는 특히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풍문을 돌았다. 첫사랑의 두근거림, 견딜 수 없는 사랑스러움에 숨조차 막히는 순간, 애정을 되새기는 간지러움, 그리움에 발버둥 치는 씁쓸함. 사랑하는 이를 두고 느끼는 보편적인 감상과는 달랐다. 심장을 비틀어 뜯어버리는 듯한 같은 아픔이었다, 생살을 씹어먹은 듯한 메스꺼움이었다, 반년간 굶은 뱃속에 쓰레기를 처넣은 듯한 울렁거림이었다. 세간에서 떠드는 사랑과도 닮아도 닮지 않은 충동이 파도치듯 해일을 일으킨다. 구역질 나와, 그딴 얼굴 하지 마, 왜 고작 나 같은 인간을 마주하고, 네가, …….

 

  “그러니, 같이 떨어질까요.”

 

  우악스러운 힘이 온몸을 끌어당긴다. 사람이 중력에 거스르지 못하듯 저항할 수 없는 검은 파도에 끌려간 몸이 속절없이 무너진다. 겨울바람이 얼굴을 매섭게 할퀴고, 별도 없는 밤이 경계선조차 보이지 않는 바다에 녹아든다. 그렇게 시야가 무너짐에도 스스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가정이다. 만일 정신을 차리고 있다고 했어도, 저항할 힘이 있다고 했어도, 인간은 중력에 거스를 수 없다. 눈앞에 존재하는 중력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검은 파도를 인지하고도 거스른다는 선택을 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고작 유년기를 함께 했던 게 전부인 소꿉친구에게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다. 붙잡힌 손을 내치고 싶었지만, 붙잡힌 손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다. 모순적인 사고가 어리석은 이의 밑바닥에 들러붙고, 완전히 기울어진 몸이 기어코 포물선을 그리듯 아래로 추락하자 그제야 깨닫는다. 

 

  내 몸이 절벽에서 떨어지고 있다. 

 

  혼자서 떨어질 생각이 없기에 함께 떨어지길 바란 소꿉친구는 본 적 없는 평온한 얼굴을 하고서 감고 있던 눈을 뜨고는 웃었다. 떨어지는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평온하고, 평화로운 얼굴. 이 순간이 찾아온 게 당연한 순간이라고 말하듯 소꿉친구는 떨어지는 몸을 끌어안는 것도 없이, 그런 주제에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손을 잡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게 눈앞에 존재했다.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게 눈앞에 존재했다. 어둠에 파묻혀 누구의 눈에도 들지 않고 시작한 파멸이 소리도 없이 사라지기 위해 먹물을 부은 바다로 떨어진다.

 

  어둑한 시야에서도 희미하게, 그러나 선명히 보이는 얼굴.

 

  “류세이.”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말하듯 지어진 미소, 기쁜 듯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그 모든 게 머릿속에 기록되지 못하고 물잔이 기울어지듯 검은 바다에 쏟아진다. 그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그 지옥과도 같은 검고 검은 바다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먹은 것조차 없는 빈속에서 구역질이 올라왔을지도 몰랐으니. 

 

  풍덩.

 

  검은 바다에 물거품이 일었다. 무겁게 침몰하는 중력에 저항할 의지도 없는 몸이 추락한다. 아른거리는 시야는 먹물이 쏟아진 듯 검고 검어서, 올려다본 물 수면조차 새까맣기 짝이 없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고작 죽음 따위에 두려움을 느끼기에 우리는 너무나 먼 길을 걸어왔으니까. 우습게도 이런 순간에서조차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얼굴이 잊히지 않고 눈앞을 아른거렸다. 그리고 역시…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04.

쿨럭, 쿨럭. 

 

  폐 속에 고여있는 물이 공기를 들이마시자 곧장 바깥으로 밀려 나간다. 물에 젖어 무거운 몸을 억지로 이끌고 걸어가는 것은 가파른 산을 올랐을 때보다도 힘들다. 죽기 어려운 몸이 되었다고 해도, 회복이 빠른 몸이 되었다고 해도, 체력이 초인처럼 늘어난 건 아니었다. 매몰되어가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서 거센 물살이 휘감는 바다를 헤엄쳐서 나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치면 해저 깊은 곳으로 침몰할 몸을, 그 거센 물살이 뛰어노는 바다를 헤엄쳐 겨우 발이 닿는 곳까지 정착한다. 몇 번이고 기침하고 나서야 폐 안에 잔재하던 짜디짠 바닷물을 뱉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바닷물이 남아있는 것처럼, 바닷물의 짠맛이 폐에 스며들어 속을 쓰리게 만든다.

 

  “…야, 무거워.”

  “바닷물에 젖은 옷은 생각보다 더 무겁네요.”

  “무거운 거 알면 알아서 걸어….”

 

  부축을 받고 태평한 소리를 내뱉는 자살 미수 사건의 주범은 이제 만족했다는 듯 어깨에 걸치고 있던 팔을 빼내고 홀로 무거운 걸음을 내민다. …결국 뭘 하고 싶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검은 바다에 침몰해 물거품처럼 사라질 생명을 억지로 끌어안고 돌아온 것은 누구도 아닌 자신이 한 선택이었고, 사건의 주범은 스스로 희생해 바다로 몸을 빠뜨린 주제에 돌아가는 길 내내 눈을 똑바로 뜨고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끝내고 싶었던 건지, 끝내고 싶지 않았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호기심에서 나온 장난이었는지. 간신히 몰아쉰 숨을 고르게 정리하고 물을 먹어 무거워진 몸을 이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없었다. 나는 고향을 뛰쳐나온 그날부터 한순간도 죽고 싶지 않았던 적이 없었기에.

  물 먹어 축축하게 젖은 천에서 쉴 새 없이 물방울이 떨어졌다. 사납게 요동치던 물살과 달리 기이할 정도로 평온한 바다 표면 위로 바닷물이 떨어지면서 크고 작은 파동을 그린다. 두려워하던 것이 우습게도 속수무책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은 해일은커녕 작은 파도조차 만들지 않았다. 성인 두 사람 분의 무게가 바다에 커다란 표면장력을 만들어도 치지 않았던 해일이 고작 물 한 방울로 만들질 리가 없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이미 예전부터, 작은 파도가 치는 것도 두려워했던 오랜 옛날부터……사실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어. 네가 신이 아니라는 거,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전부. 나는 네가 두려운 게 아니야….”

  “확실히 저도 당신의 신이 된 기억은 없네요. 그럼, 당신은 뭐가 그렇게 두렵나요.”

  “난……,”

 

  너와 함께하는 게 두려워. 

 

  네가 아니라, 너와 함께 있는 시간이, 함께하는 순간이…. 그렇게 함께하는 것으로 더 많은 걸 바라게 될 자신의 욕심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걸 바라게 될 미래가, 그 끝에서 찾아올 공허함이…. 아마도 그랬었던 것 같다. 결론을 위해 고민하는 시간은 길었고, 그에 대한 답을 도출하는 건 빠르다. 결과적으로 나는 너라는 존재를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다. 너라는 존재가 신이라고 진정으로 믿었던 것도 아니었다. 신으로 믿고 떠받드는 걸 편하게 여겼다. 나를 멋대로 헤집어대는 너를 신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자리에 올리고 두려워하는 걸로 너에게서 도망쳤다. 결론이 났음에도 단단하게 붙은 입은 움직이지 않아서 결국 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하늘은 여전히 별 하나 없이 새까맣고, 바다는 먹물처럼 칠해져 있다. 물기가 머금은 옷은 무겁고, 사나운 물살을 헤치고 올라온 몸은 천근처럼 피로하다. 검은 바다는 여전히 파도 하나 치지 않고 평온해서 하늘과 바다의 경계선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다. 폐가 쓰리다. 속은 여전히 뒤집힌 듯 울렁이고 구역질이 나올 듯 시큼한 맛이 입에 퍼진다. 그래도 다행히도, 아직 토사물은 나오지 않았다. 떨어진 김에 놓아버린 손 덕분에 그런 걸지도 모른다. 더 이상 그 속을 뒤집는 찬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류세이,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넌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물어볼 것도 아니잖아.”

  “네, 그러니까 물어볼게요.” 

  “아닌 척이라도 좀 해라…. 뭐가 그렇게 궁금해?”

 

  왜 살려고 하셨나요. 

 

  앞으로 나아가던 걸음이 느리게,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 멈춘다. 매서울 정도로 시리고 차가운 겨울의 바닷바람은 온몸이 물에 젖어서 그런지 더 차갑게 느껴진다. 왜 그런 고생까지 하면서 살기를 선택했냐고. 상대방의 허가도 없이 멋대로 동반자살을 시행한 주범은 뻔뻔하게 왜 살았느냐를 따진다. 물론 따지는 게 아니라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한 의문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뻔뻔하다는 것에는 변함없다. “죽고 싶잖아요.” 나무에서 떨어진 그날, 우연을 가장해 처음으로 만났던 날 죽음을 각오하던 어린아이에게 삶을 허락한 작은 신은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아무것도 모른 채로 물었다. 왜 살려고 했냐니, 침몰하던 순간 문득 들었던 생각을 다시금 떠올리고 웃음을 터뜨린다. 뼈가 얼어버릴 것처럼 추워서 돌아버린 걸지도 모른다, 제정신이 아니게 된 걸지도 모른다. 무게에 견디지 못한 겉옷이 기어코 무겁게 추락해 수면 위를 유영한다. 

 

  “네가 기쁜 얼굴을 하는 게, …배가 뒤틀릴 정도로 싫었어. 그래서 카나에의 계획을 전부 뒤집어서 또 그때처럼 화를 내도록 만들고 싶었어. …그게 전부야.” 

 

  다시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없이 기쁘게 웃는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속이 뒤틀린 울렁거림을 단순한 거부 반응 따위로 치부하기에는 거기서 올라오는 감정이 달랐다. 이유는 몇 개고 들 수 있었지만, 결국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으로 애정을 표현한 것이다. 유치해. 나이를 이렇게나 처먹고서.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언제고 둘이 있으면 어릴 적으로 돌아간 듯 굴었다. 때로는 유치하고, 때로는 단순했다. 어른의 사정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어린아이. 나도, 너도. 시간이 이렇게 지났음에도 여전히 둘이 만든 세계에 갇혀 있다. 

 

  대답이 곧장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짧은 정적, 다시 걷기 시작한 이전보다도 가벼워진 걸음. 젖은 옷은 조금도 마르지 않았고, 발목까지 차오른 바닷물은 여전히 무겁도록 시리다. 무엇하나 가벼워진 것이 없음에도 가벼워진 걸음. “…그런가요.” 카나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평범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웃었다. 그래서 나도 웃었다. 카나에가 무슨 생각을 하고 웃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무엇 하나 알 수 없었지만,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너무 즐겁게 들려서, 그게 내가 아는 이에시키 카나에와는 너무 어울리지 않아서 웃음이 나왔다. 

 

  별을 보기 위해 떠난 짧은 여행은 작은 별 하나 보지 못한 채 검게 드리운 밤하늘의 장막을 배경으로 막을 내렸다. 겨울바람은 뼈가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고, 먹물처럼 검은 바다는 아플 정도로 차갑고 깊었기에 그곳에서 얻은 건 젖은 옷이 전부였지만, 그래도 발걸음을 옮긴 것을 후회하는 기분은 이상하게도 들지 않았다. 




 

  “이번에도 특별했나요.”

  “매번 특별해. …짜증이 날 정도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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