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사각사각 유리가 부딪혀 깨지는 산뜻한 소리. 그만큼 날카로운 바람을 맞으며 걸음을 뗀다. 돌이 밟히면 작게 서로를 긁는 소리가 난다. 깨지고, 닳고, 간간이 모서리가 둥글어진 조개 껍데기나 유리 따위를 찾아내 시선이 멈춘다.
예쁘구나.
목소리로 나온 모양이다. “뭐가, 모래잖아.” 하고 감수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대답이 돌아와서 발로 돌을 찬다. 첨벙, 물에 떨어져 가라앉는 소리. 자잘한 물장구 치는 소리.
앞서가는 팔을 가볍게 당기면 돌아본다. 조금 더 당긴다.
다시 조금 더. 하늘이 뒤집어질 때까지.
2.
“얌전히 살면 덧나냐, 너는?”
“너도 재미있어 했잖아.”
“그건 그랬지만. 아니, 위험한 거 알잖아.”
이치지쿠는 기차에 앉아서 고개를 돌린다. 건너편에서 한숨 비슷한 소리가 들려와서 더 뻔뻔하게 의자에 편하게 기대버렸다. 조금 뻣뻣한 의자 시트가 눌려 끽끽 비명을 지른다. 나프탈렌과 라일락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창가에서 들어온 빛이 바닥과 창틀에 비쳐 이리저리 튀는 걸 눈으로 쫓던 이치지쿠가 입을 열었다.
“배고파.”
“⋯⋯.”
이번엔 한숨이 아니라 앓는 소리다. “네가 갑자기 사기 싫어졌다고 했잖아. 아까. 도시락 다 골라놓고.” 야츠모가 가볍게 팔걸이를 손바닥으로 치자, 고개를 든 이치지쿠는 심술궃게 말했다.
“지금은 사고 싶어졌단 말이야.”
1월 말, 여행의 한창. 자정이 지나면 2월로 넘어가는 시기.
성수기도 지나 승객이라곤 드문드문한 기차의 창가에 단 둘이 앉아서 한결같이 시시한 말싸움만 반복하고 있는 두 명의 목적지는 계절에 맞지 않게도 바다였다. 벌써 창밖에서는 해안이 보이고 귀를 기울이면 기러기 우는 소리가 멀리서 귓가를 간지럽힌다. ‘여행객이 거의 안 보이네’ 말한 야츠모에게 대답하듯 이치지쿠는 창문을 살짝 연다. 찬 바람이 부드러운 공기를 밀어내며 볼에 닿았다.
“내리면 살래, 도시락.”
“내려서 사는 거에 의미가 있는 거냐고.”
“사고 싶어졌으니까.”
“나도 그렇지만 너도 낭비벽 있는 거 아냐?”
“야츠모군은 아예 싹 날려버릴 때도 있잖아. 난 그 정도는 아니거든? 갑자기 사고 싶은 게 생길 때가 있는 거지 기본적으로는 계획적이거든?”
“잘도 말한다.”
여기 오게 된 것도 사고 같은 거면서. 말한 순간 어디선가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고가 났나, 창 밖을 내다보자 눈앞을 까만 소매가 가리고 창문 닫히는 소리가 둔하게 들려왔다. 왜 닫는 거야. 항의하듯 시선을 치켜뜨면 야츠모는 창 밖을 한 번 살펴보고 나서야 한숨과 함께 이마를 툭 기대왔다.
“여기 왜 온 건지 기억하지?”
“너처럼 단세포인 줄 알아.”
“진짜 한 마디를 안 지네.”
다시 털썩 주저앉는 야츠모. 이치지쿠가 다시 시선을 돌려 테이블을 바라본다. 중간에 샀던 마멀레이드 잼을 바게트에 올려 먹었던 흔적과 찻잔, 그 옆에 세워진 휴대폰. DMB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도쿄 타워가 무너지고 2주가 지나고 있습니다. 현장에 폭탄을 두고 간 이들은 전부 손에서 손으로 부탁을 받아 짐을 옮겨둔 중간책만 8명으로, 개중엔 이른바 ‘증발’된 사람들도 있어 익명으로 들어왔던 신고를-⋯.』
툭.
화면부터 테이블에 엎어진다. 잠깐 몸이 앞으로 쏠렸다가 다시 기우는 감각을 느끼며 이치지쿠가 기지개를 한 번 쭉 폈다. 정차를 알리는 방송이 들려오고 있었다.
“⋯역시 온천도 갈래.”
“지나쳤잖아!”
“그럼 야와타하마까지 가면 되는 거잖아?”
“어디야, 거긴.”
“여기 섬 거의 끝. 일본지리 성적 나빴지, 너? 완전 졸았지?”
“그게 지금 중요하냐고. 그래서 어디까지 갈 건데?”
“몰라, 그런 건.”
목적지를 정해놓고도 다른 길로 샌 전적은 수도 없을 정도다. 이케부쿠로에서 나오면 안 되던 시기를 빼면 이상한 곳에서 며칠이고 눌러앉은 적도 허다했다. 그런 너도 여행이라고 하면 느긋해지면서, 라고 말하며 핸드폰을 닫아 주머니에 넣자 야츠모는 ‘뭐 그건 그렇지’ 하는 얼굴로 빈 잼 통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내리는 사람은 단 둘, 야츠모와 이치지쿠 뿐. 시모나다의 무인역에는 아무도 없다. 낮이라 더 비어 보인다.
“저기.”
“왜.”
“눈 온대.”
그러냐, 하는 대답을 흘려넘기고 역에 앉아 바다를 가만히 바라본다. 얼마 없는 짐이 든 작은 캐리어를 옆에 세운다. 어차피 캐리어를 끌고 온 건 야츠모다. 어깨 사이의 미세한 틈을 꾹 눌러 좁히고, 이치지쿠는 버건디 색 목도리에 고개를 기댔다. 그런 이치지쿠의 목에도 흐린 민트색의 목도리가 둘러져 있다. 차가운 바람 때문에 약간 버석한 감촉이었다. 이치지쿠는 목도리에 머리를 두어번 문질러 보고 솔직하게 촉감이 별로라고 얘기했다. 난 이렇게 솔직한데 말이지, 문득 생각한다. 돌아가기 위해서 다시 기차를 갈아 타면서 이치지쿠는 또, “역시 바다도 가고 싶네” 말한다. 본의 아니게 적응해버린 야츠모가 노선도를 찾았다. 궁금해서 샀던 마롱 글라세를 두 알 먹고 ‘달다’ 며 나머지를 하나씩 야츠모의 입에 넣어주면서, 이치지쿠가 호텔에 전화를 걸었다. 네에, 취소하려고요. 곤란해요? 그럼 체크인이랑 아웃은 알아서 해 주세요, 뭐, 취소는 말고. 그러고보니까 거기 주변에 미츠야 군 살던가? 저기, 그럼 명의 변경으로요. 결제 취소? 안 해도 된다고 아까 말했는데요. 다시 다른 호텔로 전화해서, 네, 오늘 묵으려고 하는데요, 사전 결제로요. 언제 갈지 몰라서. 마지막으로 지인한테 연락해, 저기, 거기 호텔 있잖아? 예약했는데 안 가게 됐거든요⋯.
마롱 글라세. 너무 달아서 두 명의 입맛에는 그냥은 먹기 어려운 음식. 5개째에 야츠모가 결국 기침한다. 목 안쪽을 울리며 웃고, 이치지쿠는 재밌어 보인다고 샀던 바닐라 콜라를 건네주었다.
“⋯야, 잠깐, 뭐야? 이것도 너무 달잖아. 뭐야 이거?”
“바닐라 코카콜라.”
“단 거 먹이고 단 걸 준다고.”
“어라, 목이 메인 거 아니었어? 밤이라 뻑뻑해서? 그럼 이거 줄게, 아-.”
아-하고, 이치지쿠가 꺼낸 건 작은 위스키 병이다. 마사키 역까지 앞으로 40분. 또 한 번 질리지도 않고 벌어진 입씨름 사이사이로 3분의 2는 야츠모가, 3분의 1은 이치지쿠의 입 속으로 나눠 들어가기 충분한 시간.
3.
펑, 인지 쾅, 인지 하는 소리와 함께 오세치 요리 하나가 야츠모의 입 안으로 사라진다. 이치지쿠는 음식을 잡았던 손을 떼면서 저 뒤로 보이는 화려한 불꽃과 굉음을 흘려넘긴다. 마치 여름 축제를 할 때처럼 색색깔의 강렬한 빛이 뒤로 번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름 축제가 아니지. 이치지쿠는 코끝으로 느껴지는 매운 화약 냄새를 맡으며 야츠모와 소리죽여 웃었다. 아니, 소리내서 웃었을지도 몰라. 폭발 터지는 소리에 잠깐 귀가 먹먹했다가 말았다. 나름대로 거리를 둘 생각이었는데, 아직 가까웠을까.
“다음은 뭘로 줄까?”
“기다려 봐, 아직 반주도 안 마셨거든.”
“난 그거 싫더라.”
뭔가 오염되고, 맛없잖아, 한 입도 대지 않은 잔을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이치지쿠는 절실하게 깨닫는다. 본래도 하고 싶은 것을 참는 편은 아니었지만 요즘은 유독 충동적이었다는 것을. 설마하니 정말로 저걸 폭파시킬 줄 누가 알았을까. 이치지쿠도 몰랐다. 아니, ‘소방차 되고 싶어’ 라고 얘기한다고 누가 정말 진지하게 되고싶어 하는데? 어린 애라면 그렇겠지. 난 애석하게도 어린애가 아니라서 어찌됐건 ‘될 것 같은 일’만 하는데. 누가 들어도 퍽이나 그렇겠다 할 생각과 함께 이치지쿠의 사고는 이어진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도쿄 타워를 무너뜨릴 이유가 하나도 없다. 진심으로 즐거워할 이유도 특별히 없고. 말하자면 아주 낮은 충동. 제정신이면 안 할 짓. 대책을 생각했느냐고 하면 이치지쿠는, 할 수 있는 건 했다고 해도 ‘뭐 어쩔 수 없지’ 생각한다. 죽든 잡혀서 갇히든 어쩌든. 그 상태가 본인이 바라는 것과 정 반대인 미래가 될지라도 지금 해야 하는 것은 해야 한다. 인스피레이션. 영감이라고 하나? 이치지쿠는 그런 삶 말고는 모른다. 하고 싶은 것은 해야 한다. 꽤나 글러먹은 인간이로군, 남 일처럼 평가한다.
“네가 그러니까 체중이 그런 거야….”
“뭐가 어때서.”
조금 화려하게 날려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뭔가, 라고 하면 문득 생각난 것이 이 타워다. 이게 뭐라고. 그러게 말이야, 이게 뭐라고 그렇게 좋아하나 몰라. 신년에 뽑은 운세가 대흉이었던 것이 등을 밀었다. 어차피 대흉이라면 뭘 해도 상관없지 않을까? 뭐, 그래, 하나 정도 더 날려 버려도 문제 없지.
“게다가 새로 뽑은 거 대길이야.”
“그런 거 덮어씌우기가 되는 거야? 처음 듣는데?”
“날아가 버렸으니까 할 수 없잖아?”
애초에 극단적인 오미쿠지가 나쁘다. 이 말에 야츠모가 어이없단 얼굴로 흔들리는 오미쿠지를 보다가 쓰게 웃는다. 이치지쿠는 혀를 짧게 빼물어 웃었다가 드문드문 빈 오세치 찬합을 내려다본다. 적당히 집어먹은 게 연근 조림이었다. 좀 단걸. 손가락 끝을 가볍게 핥는다.
왜 이렇게 충동적이 되었을까.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사이가 오히려 이치지쿠 치고는 과하게 참을성이 좋았다. 야츠모는 어느날 “생각보다 별 난리 없어서 안심했었다고 할까, 뭐랄까….” 지나가듯 말했다. 이치지쿠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그야, 쿠로이키 군, 너, 내가 상냥하다고 했던 건 다 까먹은 모양이지. 난 딱히 괴롭히고 싶은 게 아니라니까. 가능하면 친절하게 대하고 싶은 것도 진짜고, 너는, 그래, 오래 본데다가 신세도 졌고, 그리고….
야츠모 군, 나는 딱히, 취향이 특이한 것도 아니라니까.
파도가 오래 치지 않는 바다에는 쓰나미가 온다고 한다. 이치지쿠는 이 한 문장으로 지금의 난리를 요약했다. 충동이래도 본인이 제어할 수 있는 충동이었다면 지금은 그게 잘 안 된다. 그것이 기분은 별로 좋지 않다. 뭐, 당연하지만, 나도 결국 인간이라는 거지. 뭐든 과하면 좋지 않으니까 말야.
“어쩔거야, 이거.”
“왜?”
경찰한테 잡히면 이번에야말로 감옥이라고, 말하던 야츠모가 뒷목을 주무른다. 정말 신주쿠에 이사라도 갈까 고민하는 눈치다.
“거기 간다고 안 들키나.”
“왜 아무렇지도 않냐, 주모자 씨?”
“새벽이잖아?”
입을 열면 입김이 흐릿하게 피어오르는 새벽. 금성이 아직 뜬 시간. 이치지쿠는 문득 장난을 치는 듯한 표정으로 야츠모에게 손짓한다. 가까이 다가온 귀에 자기도 상체를 숙이고, 손으로 귀를 살짝 감싸고, 입술을 작게 움직여 속삭인다. 나 말야, 아무도 없는 시간을 알고 있거든.
“⋯왜?”
“들어서.”
“누가 뭐하러.”
“도쿄 타워는 전파탑이니까.”
이익 싸움이야, 그냥. 스카이 트리 세우는 중이고. 나 조금밖에 도와주지 않았는걸. 조금 연락이 늦었으면 우리도 터지는 타워 아래였을 수 있다며 태연히 다음 오세치 요리를 꺼내 야츠모의 입에 대준 이치지쿠를, 야츠모는 선글라스를 꺼내 이마를 딱 때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죽을 뻔했다는 말이잖아!”
“아파! 뭐 하는 거야! 게다가 딱히 상관없잖아! 네에 그거 참 낭만적인 결말이네, 그럼 됐지!”
“그걸 말이라고 해?”
“말이면 말이지 뭐야? 역시 시끄러워질 것 같으니까 여행 갈래.”
“⋯⋯왜 대책이 더 없어졌지? …어디.”
“몰라. 어디든.”
그런데, 이런 대화, 10월쯤에 했었네 하고 이치지쿠가 말하면 야츠모는 잠시 조용해진다. 그때는 혼자 갔었지, 이번에는 이치지쿠도 잠시 조용해진다. 저 뒤로는 도쿄 타워가 반파되어 꺾이고 있고, 폭탄 사이에 섞여 있던 폭죽이 반짝이는 하트 모양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오모키가 아주 좋아할 로맨틱한-동의하는 이는 적겠지만-새해 뒤로 감탄과 비슷한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이치지쿠는 문득 모든 것이 현실감이 없어지는 감각이 들었다. 자주 있는 일이다. 정보량이 임계치를 넘기면 급속히 감각이 둔해지는 것은. 그건 아주 어릴 때의 매일매일이었고, 처음 새로운 탐구 방식을 눈치챈 날이었고, 이 눈이 나았던 이후의 며칠이었다. 어쩌면 야츠모도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너무 많으면 한바퀴 돌아서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된다니까. 늘 그런 건 확실히 아니겠지만. 많이 해도 분명 나보다는 적겠지만. 그런 확인할 길 없는 자신감이 이치지쿠에게는 있었다. 아니, 자신감이라고 할까, 이건⋯.
“멀리 갈까? 바다라던가. 도쿄 만 말고.”
문득 이치지쿠는 입가에 모으고 있던 손을 내리고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적당히 챙겨서, 이것저것 사면서, 온천에 갈까, 관광지를 들릴까, 스키장을 갈까. 어차피 기분이 안 내키면 입구에서 돌아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을 느끼면서 야츠모는 이치지쿠를 본다. 뒷세계에서 어서 이름이 잊히길 바라야 하는 청부엄자의 앞에 마주 쪼그려 앉은, 오히려 더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소설가는 제 이마를 때렸던 선글라스를 뒤집어 펴고 야츠모의 눈에 씌워 준다. 검은 렌즈가 각막 위를 한차례 가린다. 아무리 익숙해도 시야가 어두워지면 섬세히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이치지쿠는 약간 모호해진 시선을 마주하고 웃었다. “거기서도 반팔로 가면 눈사람이 될 걸, 야츠모 군.”
그럼 목도리 둘러야겠네. 이치지쿠가 말하자 야츠모가 맞장구를 친다. 그렇군, 춥고.
이 대화가 아주 약간 낯설어 이치지쿠는 문득 코웃음을 쳤다. 뭐야, 그건. 마치 내가 옛날이라도 그리워하는 눈치군. 그리고 3초 뒤에 생각을 고쳐먹는다. 그리워할 수도 있지. 나도 사람이니까 말이야. 이치지쿠는 얼마 전의 맑아진 정신과 깨달음의 연장선으로 생각했다. 이건 아마도 내가 궁금해했던 것의 편린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환영하며 받아들이도록 하자. 스스로도 모르는 새에 기분이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 하는, 그야말로 사춘기 아이만한 불안정함에 그는 도리어 유쾌함까지 느끼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는 확실히 아픈 것이 좋다. 나중에 던져버리는 한이 있어도 말이지. 그건 도망이라고 하나?
“그건 너도 똑같을 지도 몰라.”
“뭐가?”
이치지쿠는 대답하지 않고 어깨에 고개만 기댄다. 며칠 새에 이런 행동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4
익숙한 것이 낯설어지고 낯선 것이 익숙해지는건 특이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이치지쿠는 그렇게 생각했다.
눈에 비치는 세상도 의미없이 일그러지던 움직임도 익숙해지면 이유를 알았다. 공포의 근원을 아느냐, 고 이치지쿠는 해변의 파도를 헤치며 묻는다. 야츠모는 ‘벌레 같은 건가’ 대답했다. 아까운 답이다. 야츠모의 장갑 낀 손이 모래 사이에서 조개 껍데기를 찾아낸다. 껍데기만 있네.
그럼 살아있는 조개려고, 이 시기에 여기까지 나와 있는 게. 이치지쿠는 속으로 대답하며 말을 이었다. 그건 이해의 부재야, 야츠모 군. 몰이해, 무지, 충동, 불규칙. 아무리 성공한 공포 영화와 게임도 시리즈가 이어지면 망하는 법이야. 이유는 간단하다. 길어질수록 정보값은 많아진다. 이해도가 높아진다. 재해는 더이상 신의 분노가 아니라 과학적인 원리에 의해 해체된다. 이윽고 인간은 인간만을 무서워하게 되는 것이다.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은 타인이다. 그럼에도 오래 본다는 것은 이해의 착각을 가져온다. 적응이라고 해도 좋아. 익숙해지는 거지. 나는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거야.
“야츠모 군, 그럼 익숙해진 것이 낯설어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글쎄….”
“그건 온전한 이해가 못 되기 때문이야.”
아무리 알려고 해도 인간은 자기 자신도 완벽히 파악할수는 없지. 그래, 그게 가능하다는 건 오만이야. 그러니 타인은 더욱 심할 것이다. 언제나 착한 인간도 나쁜 인간도 있을 수 없다. 선악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발이 파도를 찬다. 포말이 산산이 깨진다. 신발 사이로 들어온 차가운 소금물이 기분을 울적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오래 봐도 모르는 거지, 사람은.”
“너, 그러다 감기 걸린다.”
“내가 그렇게까지 약한 줄 알아?”
“아니었나?”
이치지쿠는 대답없이 파도를 한번 더 찬다. 이어진 손만이 비현실적으로 따뜻하다. 이런 거야. 속으로 속삭였다. 이런 것이다. 나는 언제부터 이걸 이렇게 당연시하고 있는가.
“뭐라고?”
“아무것도.”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뭘까?
그거야,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들이지. 당연해지지 않게 되기까지 살아있는 아주 가는 탑. ‘당연한 일’이란 그런 것이라, 이치지쿠는 미적거리는 사이 앞서 걸으며 파도를 피해 벗어나려는 야츠모의 손을, 팔을 쭉 잡아당긴다. 돌아보는 눈이 의아하다. 마주 웃어주면서 이치지쿠는 체중을 실어 한번 더 당긴다.
옛날 사람들은 쓰러지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걸 실감하였을까.
첨벙.
파도가 흩어진다. 유리 조각에 베인 듯한 날카로움에 손끝이 굳는 걸 느끼면서도 소리내 웃었다. 황당하다는 얼굴이 마음에 든 탓이다. 옅은 물결에 머리카락 끝이 풀어졌다가 얼굴에 달라붙고, 공기에 드러나면 살짝 얼어붙는다. 물을 먹은 옷 끝과 목도리 끝이 차갑게 무거워졌다. 반사신경은 좋아선. 중얼거리자 야, 하고 부르는 소리가 물소리와 같이 울린다. 이치지쿠가 잡아당겨 넘어진 상황에도 도중에 팔을 둘러 머리를 보호하듯 끌어안은 모양새다.
“뭐야, 이 운동신경은.”
“머리 부딪히는 게 더 좋았나보지?”
“그건 아닌데? 하지만 말야, 그런 거잖아. 실수하겠다 생각했더니 너무 멀쩡한것도 김이 샌다고 해, 기분이 묘한 거지?”
차가운 물이 옷 사이로 들어온다. 이치지쿠는 달라붙는 머리카락이 기분나쁘다고 생각하면서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하고 야츠모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넘겨준다.
“야, 너 손 차가워.”
이렇게 추우면 붙어있어도 딱히 이상하지 않구나. 요즘은 신기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던 것 같은데, 이치지쿠는 새삼 생각한다. 그건 이치지쿠가 으레 일부러 남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침범하는것과는 다르다. 아마도. 상대도 자연스럽다. 놀라지 않는 것이 불만이면서 좋다고 하면 얼마나 귀찮은 인간인가. 하지만 나는 원래 귀찮은게 본질이지.
시선이 맞는다. 유심히 들여다보는 듯한 눈이다. 너도 그런 걸 할 수 있게 됐네, 내가 선생님이었다면 감격했겠지. 이치지쿠는 거기서 야츠모의 관찰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품으로 파고든다. 모래가 물에 쓸리는 소리가 귀를 먹먹히 울렸다.
그런 확인할 길 없는 자신감이 이치지쿠에게는 있었다. 아니, 자신감이라고 할까, 이건⋯.
자신감이 아니라 안심감이지.
차가운 물이 온몸에 스민다. 이치지쿠는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파헤쳤다. 손바닥 위에 올린, 내 말이 반드시 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나이에 맞지 않는 어린 생각은 증명도 되지 않은 ‘내 거’ 라는 단어로 정리가 가능했다. 그건 눈치챈 것보다 더 전일지도 모른다…. 얄팍하기 짝이 없군. 중얼거린 소리를 들었는지 야츠모가 고개를 움직였다. 추위 때문인가. 살짝 엿본 곤란해 보이는 표정이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생각한다.
화나게 하고 싶어하던 거랑은 다른가. 그냥 마음에 들어서 번번이 번거로운 짓을 하나. 꼬였군. 냉소하다가도 뭐야, 어차피 난 이런 거야, 잘 해준다니 몰라, 결국 잘 안 된 걸 다시 시도할 이유도 없지, 그리 결론내리고 다시 야츠모의 어깨에 기댄다. 얼음같은 물 사이로 닿은 피부가 아슬하게 따뜻했다.
“…요즘 넌 특히 잘 모르겠네.”
“기우로군, 나도 그래.”
뭐, 아무렴 어때. 이치지쿠는 사고를 멈춘다.
일단은 오늘 또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한다. 돌아가는 길에는 초콜릿을 사자. 곧 발렌타인 데이니까. 그래, 이벤트는 좋지. 몇개나 사면 좋을까. 이번엔 뭘 할까.
"지금 꼴 웃긴 거 알지?"
"선물이야, 추억 선물."
"마음에 들어?"
"나쁘진 않아."
파도가 얕게 밀려온다. 수면에 하얀 눈송이가 닿자마자 사라졌다.
5.
“⋯⋯추워.”
“네가 넘어졌어, 네가.”
“버티면 되잖아!”
“그러면 또 기분 나빠졌겠지!”
“⋯숙소까지 얼마나 남았어?”
“⋯⋯5분.”
“⋯⋯.”
“⋯⋯.”
“의자 차가워.”
“아니, 내 위로 올라오지 말라고, ⋯⋯야, 밖이거든?”
“의자가 차갑다고.”
“야, 잠깐⋯⋯⋯.“
“게다가 나만 추운 게 아니라 너도 옷은 다 축축해서 차갑고 그야말로 옷 사이에 피부라도 붙이지 않으면 가는 길에 얼어 죽을 상태라는 거 모르겠어? 알아? 지금 유리창마저 따뜻하게 느껴지고 있다고, 눈이 오는데!”
“그러니까 네가 스스로 빠진 건데 왜 내가 타박받고 있지⋯.”
“몰라.”
“그러냐.”
“온천도 들어갈 거야.”
“3분 전에 바로 들어가면 심장마비 걸린다며.”
“⋯냉탕 다음에.”
“갑자기 무슨 냉탕⋯.”
“⋯⋯⋯.”
“⋯설마 냉탕이 그래도 온도 차이가 덜 나서? ……야, 혹시 3 더하기 2는,”
“아무리 춥다고 해도 내 뇌가 그렇게까지 바보가 되지는 않았거든, 야츠모 군?”